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20세기 프랑스 인테그랄리즘(통합주의) 사상의 사실상의 제창자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왕당파 조직 악시옹 프랑세즈에게 20세기 때부터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인물.
인테그랄리즘은 프랑스 뿐이 아니라 브라질, 포르투갈, 미약하게는 이탈리아에서도 제기되었고, 각 국의 많은 통합주의자들이 비록 샤를 모라스를 사상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인정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각 국가 사회들의 통합주의는 제각기 차이가 상당하였다. 따라서 모라스의 프랑스 인테그랄리즘만을 특정할 때에는 이를 '모라시즘'이라고 따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에마뉘엘 마크롱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에 잔존하는 모라시즘을 몰아내야 합니다.")
프랑스 인테그랄리즘, 또는 모라시즘의 주된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반혁명적이며 전통적인 국가적/민족적 고유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를 혁명 이후 확산된 근현대적 민족주의관과 융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사회들이 으레 그렇듯이 민족주의-초민족주의, 국수주의 계열 우파는 그 외의 사회적, 경제적 관점 차이에 따라 여러 계열로 나누어지는데,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모라시즘은 그렇게 나누어진 민족주의-초민족주의, 국수주의 계열 프랑스 우익 사상들 중에서도 현재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샤를 모라스는 1789 프랑스 혁명을 부정했고, 그것이 확산시킨 자유주의, 공화주의, 의회주의 등을 부정했지만, 민족주의는 부정하지 않았다. 1789 프랑스 혁명 이후로 세계로 확산된 근현대적 민족주의관은 많은 다민족 군주 국가들을 적폐로 간주하여 무너뜨리며 단일민족국가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세계적 방향성을 일으켰고, 기실 그로 인해 기존 다민족 국가들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이 혁명, 진보라는 명목 하에서 끔찍한 처지에 빠졌으나, 그 시기의 근대주의자, 진보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이를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간주했던 것처럼, 샤를 모라스 역시 민족주의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리라고 인정한다.
다만 샤를 모라스는 1789 프랑스 혁명 이후에 도래된 프랑스식 근현대적 민족주의, 그로 인한 민족국가 프랑스는 자신들의 기존 정체성을 스스로 망각한, 뒤틀리며 척추 없는 체제라고 규정하였다.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가 1789 폭동에 의해 자기 자신을 잃었으며 그 이후에 새로이 태어난 마리안의 프랑스는 프랑스가 과거 지녔던 존엄함, 정체성을 상실한 무언가라고 판단하였다. "프랑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려거든, 먼저 작금의 프랑스부터 증오해야 한다."
샤를 모라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1789 폭동 이후 자유주의자/자본가/유대인들이 그 자신들의 사익만을 위해 중구난방으로 대중을 조종함으로써 영구적으로 분열되어 하나 된 의지로 행동할 수 없게 된 분열적 국론의 체제를 프랑스가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를 타파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프랑스를 통합적인 집단 그 자체로서 하나된 의지로 나아가 긍정적 발전을 이룩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되, 1789 이후 프랑스인들 스스로도 뭔지 모를 양식으로 규정된 마리안 프랑스가 아닌, 스스로의 옛 정체성을 회복한 형태의 통합주의적 민족주의 프랑스여야 했다.
그러한 회복되어야 할 옛 정체성이란 군주제(보나파르트가 아닌), 반세속주의(가톨릭 국교화)이다.모라스는 군주제, 교회를 회복시키고 민족주의와 이를 합치시킴으로써 프랑스 민족이 존엄함,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며 이로써 진정으로 '통합'된 유기체적 국가사회를 구축하게 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가로막는 '프랑스 국가/민족에 대한 4개의 반역자 집단'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 4개의 반역자 집단이란,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이방인metics(프랑스에 충성할 생각이 없이 프랑스에 있는 이민자들)이다.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어느 국가사회이냐를 막론하고 뿌리가 깊은 것이긴 했지만, 샤를 모라스를 위시로 한 20세기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 반프리메이슨은 그 이면에 '반자유주의/반자본가부르주아지' 색채를 더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유대인, 그들의 프리메이슨 롯지는 1789 폭동의 배후인 자유주의자/자본가부르주아지의 기원 중 하나라는 것이다. 즉 그렇기에 1789 프랑스 혁명은, 사실 프랑스의 전통적 정체성을 파괴하고자 한 유대인의 파괴적 음모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구성된 찬탈자 보나파르트 가문의 '혁명 제국'은 1789를 긍정하며 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체제였기에 부정되어야 하며 공화국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789를 통해 정체성이 파괴되고 뒤틀린 채로 구성된 프랑스, 마리안의 프랑스는 당연히 프랑스를 영원히 파멸시키려는 유대인, 프리메이슨, 스위스적 개신교도 등의 조작된 음모로 구성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프랑스 인민을 위한 국론을 가질 수 없으며, 프랑스 민족 전체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는 멸망적 체제일 수 밖에 없다고 모라스는 규정한다.
프랑스와 유럽의 저명한 실증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의 제자 중 한 명으로써, 샤를 모라스는 그의 스승의 이론에서 모티브를 따와, 프랑스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영적인 결집/힘이 프랑스가 정체성을 되찾고 스스로를 재건시킬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 기초를 닦는 데에 있어서 왕정/군주제야말로 '그 어떠한 의회주의적 정당국가체의 필연적인 분열성을 뛰어넘는, 태생적으로 우월한 체제'로 정의하였다.
또한 샤를 모라스는, 그 자신이 주장하는 '온당하고 올바른, 회복된 프랑스의 체제'는 이른바 '좌익'(20세기 기준)도 환영한다고 역설하였다. 요컨대 1789를 통해 프랑스를 망친 것은 20세기 기준의 이른바 중도라고 일컬어지는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자본주의자인 것이지 사회주의적 개혁론자들은 아니라고 모라스는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한 것은 아니며 더욱이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것은 무정부주의 사상가인 조제프 프루동의 이론들 중 특정 부분들을 원하는 만큼만 자의적으로 추출하여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던 프루동 서클적인 영향에 가깝다. 비슷한 영향 속에 있던 조르주 발루아의 견해와 유사하게, 왕실/교회 등에 의해 관리되는 국가노조 또는 길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지, 자유주의자/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빈농을 지켜내는 그러한 국가노조 또는 길드에 대한 옹호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브라질 인테그랄리즘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일부 혁명적 좌익 세력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사실, 모라스가 군주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시기에는, 보나파르티즘(자유주의/대중주의 독재정 형태의 군주정)보다 늦게 죽었을 뿐 '정통주의자'로 대변되는 부르봉 왕당파 정서 역시 1883년 샹보르 백 앙리 아르투아(앙리 5세)가 사망한 시점에서 이미 소멸한 상태였다. 그러나 불랑제주의 확산의 여파와 파리 백 루이필리프 2세의 사망을 기점으로, 전통적인 정통주의 왕당파 파벌은 이미 몰락했으되, 샤를 모라스를 중심으로 새로이 통합주의 왕당파 파벌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기존의 정통주의가 자유주의 체제에 그리 비판적인 태도도 크지 않고 고리타분하며 몇 안 남은 늙은이들만이 따른다는 낡은 이미지 속에서 죽었다면, 통합주의는 열정적이며 매력적인 연설가이던 모라스의 활동, 그의 완고한 신념과 설득력, 그리고 이에 매혹된, 프랑스 공화국 체제에서의 여러 가지 '참상'들을 보면서 공화국과 1789의 유산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상당수의 청년층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으면서, 정통주의를 갈아치우고 프랑스 왕당파의 새로운 주류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이를 통해 형성된 대표적 청년 조직이 '카멜롯 뒤 루아 (Camelots du Roi)'이다. 주로 신문 배달업 청소년, 청년들이 주축이 되었다.)
기존의 정통주의에 비교하여 더 전투적이고 더 젊으며, 군주 개인의 인격에 대한 유사 종교적 애착과 같은 관념도 없는 통합주의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를 이론의 기반으로 삼아, 실증적으로 왕정/군주제가 프랑스를 되살릴 유일한 구조이기에, 프랑스 민족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구조이기에, 그렇기에 왕정을 비롯한 옛 정체성의 회복을 부르짖는다는 점에서, 군주 개인에 대한 인격 숭배적 성향을 가진 기존 정통주의와는 크게 차별화된다.
모라스는 그의 통합주의를 상징하는 유명한 구호인 '정치 우선 (Politique d'Abord)' 을 부르짖곤 하였다. 정치 우선이라는 구호는 경제가 정치보다 덜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다만 경제를 위하려거든 먼저 정치적 제도부터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기에 정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수단 뒤에 오는 것처럼. 여기서 모라스가 추구한 목적인 재편되고, 회복된 프랑스 왕국의 정치적 제도란, 전통적이고, 세습적이고, 반의회적이며, 중대할 정도로 지방분권화된 국가여야 한다. 이 네 가지 기준점을 모라스주의자들은 '사변형'이라고 표현한다.
첫째, 전통/세습은 모두 '자연적인 정치'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전통은 계승을 의미한다. 유산의 계승, 전승의 계승. 모라스는 어렴풋이 능력주의의 허점을 지적하였으며, '상속자의 의무'와 '상속 및 시험의 의무'를 주장하였다.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었던 모든 정부 체제는, 언제 어디서나, 부모로부터의 승계 제도에 대한 강력한 지지에 공개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
1789 폭동 이래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설파된 이른바 '능력을 통한 평등'은 망상일 뿐이며, 그러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이동성이란 역설적으로 금권 세습의 일종일 뿐인 것이다. 이렇듯이 세습과 계급 구조는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금권 세습의 자유주의자/자본주의자/유대인들이 떠드는 평등이라는 수사에 놀아난 대중들이 자신들도 계급적 평등 속에서 살고 있다는 환상, 능력주의라는 환상 속에서 헤엄치며 이른바 '사회적 이동성'을 통해 부유해지고 남들을 부리는 위치에 올라서리라 망상하며 실상은 그 자유주의/자본가/유대인들의 장기말로써 이용당하고 영영 부려먹혀질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당한 왕정과 교회와 정부의 감시와 보호 하에서, 계급적으로 낮다고 하여 모욕당하지 않고 부당함을 당하지 않는 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그러한 구조 속에서 각자 자신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계승', 즉 부모로부터의 세습을 통한 위치를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고 모라스는 주장하였다. 공인된 불평등의 법적 체계가 평등(을 가장한 금권세습)의 법적 체계보다 더 올바르게 인신을 보호하고 인민 스스로의 이익을 제대로 추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외교관의 아들이 외교관이 되고, 사업가의 아들이 사업가가 되며, 농부의 아들은 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합법적 정부, 온당한 정부란 이렇듯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민중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정부를 의미한다.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위치에서 최대한도의 이득을 볼 수 있게끔 공익을 베푸는 정부, 그 공익적 사업에 성공하는 정부가 성공적인 정부이다. "정책은 그 결과물로 판단된다."
둘째, 반의회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반의회란, 1789 이래 자유주의자/자본가 등이 만들어낸 중앙 정부 의회 체제를 의미하며 대의제 의회민주주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대의제 의회민주주의 파괴를 바라던 사회주의 계열 세력 중 일부는 그런 부분에 한해서 만큼은 모라스에게 동의하기도 하였다.
모라스는 지방분권주의자인 만큼 지역의 일은 지역이 가급적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반근대주의적인 것이지 봉건제 지향적인 것이 아니므로, 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적 결집을 방해할 여지가 있는 봉건적 영주 체제는 거부하였다. 그렇기에 시 의회/지방 의회의 존재를 그는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애초에 시 의회/지방 의회는 중세 시절에도 이미 있었던 전통적 개념이기도 하고. 다만 가장 중대한 국가, 민족의 중심을 이룰 중앙 정부에서의 판단은 결코 의회 구조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의제 의회민주주의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본가,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수립한 가면무도회에 불과하며 그 가면무도회는 그러한 이들의 제각각의 이권 문제로 인해 필연적으로 모든 면에서 변덕스럽고 단기적일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장기적으로 일관된 외교 정책 따위는 꿈꿀 수 없게 되며, 정책을 장기적으로 안정 집행하는 것을 보장해 줄 수단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간의 역사 속 모든 공화국들이 증명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불평등은 필연적인 것임에도, 불평등 속에서의 차별과 위화감을 철폐하는 실질적 개선 행위 대신 말 뿐인 평등에 불과한 거짓 수사로 대중들을 춤추게 만든 자유/평등 신화는 철폐되어야 할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수적 우세에 대한 의존과 계급 평등성이라는 신화를 내세우며 만인이 이타성을 상실하고 이기성만이 남게 되어 결국 자멸할 뿐인 개인주의로의 유도는 국가사회는 물론 최종적으로 개개인마저 파멸케 하는 개념이다. 모라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공화주의 교사, 유대인 사업가, 의회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모라스는 이 모든 대의제 의회민주주의라는 직함을 내건 가면무도회의 배후 조종자들인 유대인, 금융가, 자본가들의 '가면극 배후의 금권 지배' 또한 비판하였다. 물론 모라시즘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하는 사회주의 이론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금융가, 자본가 그 자체를 언젠가 파괴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민중을 거짓 선동으로 조종하는 동안 실질적으로 국가사회를 지배하는 그들의 불법적이고 금권적인 영향력 행사 방식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정, 교회, 그리고 왕정과 교회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 농민이 국가노조 또는 길드적인 구조를 활용해 금융가, 자본가, 유대인들을 단죄하고 감시하고 억제함으로써, 탐욕스러운 기업가들, 자본가 부르주아지들이 자유주의적 선동을 부르짖지 못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오직 그들이 해야 할 일(정부가 지정한 제한 안에서의 사익 추구)만을 하게 되리라고 모라스는 주장하였다.
셋째, 지방분권화가 옳으며 중앙집권화는 철폐되어야 한다. 모라스의 지방분권성 옹호는 프루동 서클의 영향성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그러한 영향에서 사뭇 거리감이 있던 브라질 인테그랄리즘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다.(브라질 인테그랄리스트들의 최우선적 목표는, 노예제와 인종차별 속에서 급격히 성장하고 브라질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탐욕스러운 전통공화파 지주들의 파멸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사익을 위한 지방분권을 주장하는 공화파 지주들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휘어잡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기에 중앙집권을 지향한 것이다.)
그는 1789, 찬탈자 보나파르트 혁명 제국의 유산인 중앙집권화는 모든 지역민들의 의중을 무시하고, 중앙에 밀집해 있는 탐욕스러운 유대인, 사업가, 자본가, 금융가, 자유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모든 전국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공화국이라는 그들의 가면 무도회장을 만들어주는 구조라고 간주하였다.
즉 공화정은 오직 중앙집권화 속에서만 유지가 가능하며, 따라서 역으로 군주정으로의 전환은 지방분권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지방분권화를 통해 지역민들을 중앙의 국가/민족 반역자들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모라스는 또한 중앙 공화정부가 선심 쓰듯이 지방에 어떤 혜택을 주면서 이를 지방분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실질적 지방분권이 아닌 교묘한 용어 선택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요컨대,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상권이 생기게 하라 라고 명령해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방분권이겠는가, 그것은 중앙집권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의 이론적 동지이기도 한 지방분권주의자 모리스 바레Maurice Barres와 마찬가지로 샤를 모라스에게 지역민이란 각자의 고향에서 마땅히 주어질 세습적 삶을 살아가면서 왕국 신민으로써의 정치적, 인민적 의무를 수행하며 고향을 스스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이들이지 비참하게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와서 하수구를 전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1789 폭동 이래의 자유주의자, 자본가, 유대인 등이 나라를 중앙집권화시키면서 푸아투, 아키텐, 프로뱅스, 브르타뉴, 부르고뉴, 노르망디 등 각 지방과 지역민들의 삶은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지역민들이 비참하게 파리로 상경하여 하수구를 전전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각 지방은 스스로 자생할 능력을 상실한 채로 파리에 종속되어 파리가 던져주는 무언가가 없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필멸적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이로써 각 지역민들은 지역적 전통, 지역에 대한 애착, 이를 통한 국가에 대한 애착을 가지기는 커녕 그 모든 이타심을 상실하고 수도권에서 오직 생존을 위한 이기심만이 남은 비참한 난민으로 전락했다.
모라스는 이 모든 참상은 오직 중앙집권의 파멸로 치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중앙집권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코뱅적인 거짓말인 평등과 마리안 프랑스의 정체성 없는 민족주의는 소멸하며, 지역적 전통과 지역민의 권리가 존중되고 그들이 각자의 땅에서 스스로들을 가꾸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적이고도 세습적이며 정체성이 있는 가톨릭 민족국가 프랑스로 재전환되는 것이다. 이로써 유기체적이고도 통합적인 왕국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자치하는 지방들의 결집이다. 각 지방들은 자치하는 코뮌들의 결집이다. 각각의 코뮌들은 프랑스 민족 인민의 생활의 요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로 '회복'된 프랑스 왕국은, 비로소 '통합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이며, 마침내 그가 비판하는 1789 프랑스 혁명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민족주의 국가란, 관념적이고 법적인 뜬구름 잡는 듯이 추상적인 민족국가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드러내는 자연적이며 프랑스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민족국가로써, 인민을 완전히 보호하고 생육할 수 있게 한다. 1789 폭동으로 촉발된 형태의 마리안 프랑스의 관념적 민족주의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던 모든 지역민, 모든 신자, 모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는 체제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샤를 모라스는 유대인 외에도 개신교적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에 대해 이것이 1789 폭동에 영향을 준 기원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비판하였다. 그는 종종 그가 생각하는 만악의 근원을 '스위스적 사고방식'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는 장 칼뱅과 장 자크 루소의 신앙관, 사상을 칭하는 것이다.
샤를 모라스는 그리스 로마적, 라틴적 고전주의 문화에 심취했고, 또한 그것이 프랑스의 정체성이라고 규정했으나, 장 자크 루소 이후로 촉발된 계몽주의, 낭만주의 등이 이 전통적 정체성과 현 프랑스 사회 사이의 단절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모라스는 반유대주의 성향에 못지 않게 반개신교 성향도 강력하여, 그의 저서들에서 유대인/금융가에 대한 공격에 걸맞은 빈도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개신교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가 그의 저작들에서 문명의 개념과 그 원리에 관하여 정의할 때에 그는 이른바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개신교 반란은, 프랑스 뿐이 아닌 유럽 전체에 정체성적 혼란을 일으키고 문명을 후퇴시킨 행위였다고 단언한다. 그는 그가 폭동이라고 일컫는 1789 혁명에 대해서도 '개신교 반란의 연장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토록 개신교를 비판한 이유는, 개신교의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그의 스승 오귀스트 콩트가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대해 개인주의 또는 개인주의로의 지향성을 의미한다고 고찰했던 것에 모라스 본인도 동의하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없어져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개인주의를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프랑스 인민의 사회적, 정치적 유대를 파괴하는 퇴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를 모라스가 몸 담은 왕당파 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 내부의 동지들 중에는 자크 들레베크, 앙리 뵈그너 등 개신교 신자들도 존재하였고, 왕정복고라는 목표를 함께 지향하는 동지들을 공격할 수는 없었던 샤를 모라스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반개신교 성향을 누그러뜨렸다.
그의 이러한 개신교에 대한 태도 변화는, 저명한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개신교도인 오네심 레클뤼의 사망 소식을 듣자 생전 그와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며 슬퍼하고 그의 죽음을 추모한 일로도 잘 드러난다.
샤를 모라스는 그의 저서 Mes Idess Politiques의 서문에서 '정의로움'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자/자본가/유대인/프리메이슨 등이 주장하는 신분적 평등성은 대중들을 꼭두각시로 부리면서 자신들의 불법적인 금권 세습 통치를 영구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며, 신분적 계급적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그러한 불평등은 딱히 정의로운 것도, 그렇다고 불의한 것도 아니며, 개인이 그것을 바라고 아니고 와는 무관하게 역사가 증명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증명 중인(평등이라는 거짓말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금권 세습을 이용해 사실상 부유층 부르주아지와 빈자로 양분되는 신 불평등 계급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명백한 결과물이자 현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모라스는, 평등이라는 구호를 주워 섬기며 그렇기에 군주제/왕정을 따를 수 없다는 공화주의자들은 그것이 빈자라면 평등이라는 거짓 가면극에 눈이 가려진 채 불법적 금권 세습 통치자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손 안에서 춤을 추는 세뇌된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이 금권 세습으로 불법적 권력을 행사 중인 부유층 부르주아지라면 당연히 그렇게 변명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샤를 모라스는 애초에 평등/불평등에 대해 정의롭느니 불의하느니 하는 평가를 부여하는 것은 인상비평에 불과하고 의미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며, 각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자유주의자들이 떠드는 능력주의를 통한 사회적 이동성의 환상과는 달리 사실 개인 의지의 결과물조차 아니라고 주장한다. 샤를 모라스는 많은 정치적 문제들, 오류들은 그 '정의로움'을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라스는 불평등이 필연이라면, 이러한 계급 질서를 공식적으로 긍정하고, 대신 사회적 역할에 대한 보호적 분배를 통해 이를 유익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국가/민족/인민에게 더 이익이 되는 방향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자연적 흐름을 타파하려는 시도는 오직 인위적 부작용 만을 만들기에 그 자신들이 부르짖는 불의함 그 자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이 '정의로움'이라는 관념이 헛되이 주입되어 민중 세뇌에 이용된 평등이라는 개념은, 그간 자연스럽게 구축된 문명의 성벽을 무너뜨리게 되며, 결국 문명을 완전히 파괴하고 원시적 무정부로 가기 전의 과도기적 단계라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체제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자본가/자유주의자들이 개인주의적 불법적 금권 세습을 통한 그 자신들의 불법적/인위적 불평등 지배 체계를 유지하고자 평등이라는 거짓말을 입에 담고 빈자들은 이에 선동되며, 결국 종국에는 완전히 흩어져 버린 개개인들의 무정형 덩어리로 문명이 대체되는 엔트로피적 종말에 도달한다고 샤를 모라스는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민주주의관을 인용한다. "이른바 민주주의란 죽음이다. 숫자에 의존하는 정부는 스스로를 혼란에 빠뜨리며 곧 국가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런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은 가족, 종교, 계급, 모든 종류의 조직 체계, 문화, 최종적으로는 모여있는 이들의 집단적 정체성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최종적으로 개인을 오롯이 개인만 홀로 존재하는 고립된 세계에 빠뜨려 위축시킨다. (중략) 최종적으로 더 이상 어떠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국가체란 존재하지 않게 되며, 행정부(오직 어떤 개인-금권 세습 부유층-이 다른 개인들을 필요에 의해 지배하는)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열찬 비판에도 불구하고 샤를 모라스는 지역 단위에서의 보통선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악시옹 프랑세즈 지지자들에게 보통선거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는데, 즉 평등은 거짓말일 뿐이고 민중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일이나, 그럼에도 민중은 보통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거주지를 대표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주장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근대(산업혁명 이전)의 서유럽 농민들이 결집하여 농민 협의체를 구축하고 영주들에게 줄곧 법정 소송을 걸며 스스로들의 권익을 지켜냈듯이 그것은 자연적이고 전통적인 당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단지 평등이라는 수사로 차려진 공화정만이 헛된 것일 뿐이며, 왕정과 교회의 존재 하에서 국가민족적 정체성이 유지되고 중앙 정부가 확고한 안정성과 절대성으로 모두를 인도하는 가운데에 상호 결속한 내부 체제에서 개인 권익을 지키고 지역을 발전시키는 지역 의회, 시 의회, 지방자치조직, 노조 또는 길드 단위의 선거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고 모라스는 역설한다.
샤를 모라스는 오귀스트 콩트 외에도 프레데릭 르 플래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 경험주의를 결합한 철학적 관점을 견지하였고, 이는 그의 모라시즘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연적인 개념이자 필연적 결과물인 불평등을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동시에 군주제/왕정을 지지했는데, 그의 통합주의적 군주주의 사상은 기존의 절대왕정주의적인 정통주의나 입헌왕정주의적인 오를레앙주의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모라시즘, 통합주의 군주제는 반의회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오를레앙주의와 거리가 멀다. 더하여 샤를 모라스의 군주제와 교회 위치의 복고란 어디까지나 그것이 프랑스 민족과 국가에 필요하다고 역사적으로 실증된 개념이기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국교를 지정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신앙적 이유도 아니고, 왕권은 신이 정해주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섭리주의적/인격 충성적 이유도 아니다. 그렇기에 정통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개인적 긍정/부정과는 무관하게 그것이 자연적으로 도출된 결과물이자 문명, 사회, 국가, 민족을 위해 수행하는 마땅한 제 역할이 있기에 카톨릭이 국교로 재지정 되어야 한다는 모라스의 주장은, '하나님이 존재하므로 카톨릭을 믿고 교회를 긍정하고 국교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 민족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교회를 긍정하고 카톨릭을 국교화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렇기에 샤를 모라스는 같은 왕당파라고 하더라도 낭만주의 왕당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는 유명한 브르타뉴계 프랑스인 낭만주의 작가 프랑수아 르네 샤토브리앙을 비판함으로써 그러한 태도를 확실히 하였는데, 샤를 모라스가 추구하던 프랑스 정체성 회복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질서와 명확성을 상징하는 그리스로마/라틴적 고전주의에는 상반되는 개념이 근대 낭만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샤토브리앙의 예술성, 천재성은 인정하나, 샤토브리앙의 친군주주의/왕당파 정서는 합리적이고도 실증적으로 그것을 고찰하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냥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에 의거해 구축된 것이기에 같은 왕당파로써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샤토브리앙과 같은 낭만주의 왕당파들은 독자들에게 과거의 향수, 군주제의 향수를 아름답게 묘사는 하지만, 미래에 다시 재건되어야 할 '국가/민족에게 마땅히 필요한 군주제'가 어떤 구조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모라스의 그들에 대한 비판점이었다.
이러한 관점들이 그의 모라시즘, 통합주의적 민족주의, 통합주의적 군주주의의 사상적 척추이다. 이것이 그가 왕당파의 거두가 되고, 카톨릭 교회와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한 관점의 근간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는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 신앙도 거의 없었고,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에게 사적으로 충성하지도 않았다.
'합리', '경험'에 의거하여 군주정, 카톨릭 국교화를 관찰하고 그것이 '프랑스 국가, 민족, 사회에 필요한, 자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므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과 '낭만성'에 기반한 사적인 신앙심, 충성심에 의거하는 지지는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이 모라시즘적, 통합주의적 군주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프랑스 청년, 청소년들이 정통주의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도 통합주의에는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교회와 군주에 대한 사적인 신앙심, 충성심이 없더라도, '프랑스 민족과 국가에 옳기 때문에'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를 모라스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독일에 좋은 감정이 있진 않았으며 또한 영국에 그렇게 악감정이 있지도 않았다. 비록 영국 특유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동시에 군주제와 자유주의가 타협한다는, 세계에서 영국 외에는 사례를 찾기 어려운(기껏해야 일본, 태국 정도) 영국의 독특함,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를 혼합한다는 영국 사회의 발상과 실행에 대해서는 좋은 의미로 감탄하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타협을 통해)모두가 각자의 위치에 존재한다."
또한 모라스가 독일 사회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 민족주의가 내포한 낭만주의적 성향 때문으로, 특히나 독일 사회 구성원들 다수가 지향하던 독일식 민족주의 특유의 유사 메시아주의적 사고에 대해 모라스는 극히 불합리한 사고라고 촌평하였다.
비록 모라스와 악시옹 프랑세즈가 1914년과 1939년 모두 전쟁에 동의하지 않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가 친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보아도 프랑스가 승리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는 상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무솔리니 이탈리아를 기점으로 독일로도 확산된(나치독일) 무솔리니식 파시즘의 빠르고도 강력한 사회 질서 체계 확립 능력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평하기는 했으나, 동시에 그 무솔리니식 파시즘은 극히 중앙집권적이라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프랑스가 2차대전에서 무너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독일이 유럽과 프랑스 민족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 되리라 주장하며 영국과의 친선 관계 강화를 요구했고, 이탈리아, 스페인과 협력하여 라틴권 체제를 구축할 것을 추구하였다.(발터 벤야민 "악시옹 프랑세즈와 샤를 모라스의 지향점을 이해하고 말하건대, 모라스는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세부 사항을 가장 면밀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프랑스인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독일에 대한 적대적 관점과 대독일 전략이 알려졌기에, 2차대전으로 프랑스 공화국이 붕괴되고 비시 프랑스가 설립되자 모라스가 저항을 포기하고 페탱과 함께 나치독일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전후 재판에서 부역자로 규정되어 영구 금고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도시민들 사이에서의 모라스는 단순한 부역자가 아닌 페탱과 함께 뜨거운 감자 또는 굳이 논쟁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주제로써, 다수 남프랑스 농민들/반공화파들에게는 공화국 정치가들이 패전 책임을 부역 논란으로 돌려 벌인 대규모 숙청의 순교자로써 모라스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라스는 대독일 전략에 있어서 이탈리아를 필수적인 협력 대상으로 보았고, 이탈리아의 체제(무솔리니식 파시즘, 제국주의 지향)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그들과 협력하기 위해서는 양보가 필요하며, 이는 프랑스 공화국 체제의 전복 내지 최소한 현 공화정 정부의 제국주의 포기를 선제한다고 주장하였다.(이탈리아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상당부분 이탈리아에게 떼어줘야 하므로)
모라스는 애초에 반제국주의자로써, 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제국주의는 그가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불법적 금권 세습 지배 체제의 중추인 자본가/금융가/자유주의자/공화주의자/유대인들의 책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프랑스 빈자들도 이를 통해 이득을 보지 못하며, 식민지에서의 모든 이득은 자본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유대인들에게만 흘러가면서 그들의 불법적 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에 이바지 중이라고 모라스는 주장하였다.
그러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동앗줄인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본국이 아닌 식민지 사방으로 병력을 투사하는 것은, 독일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는 그 공화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끔찍한 이율배반적 행보에 불과하며, 결국 제국주의를 유지하는 한 독일에 대한 복수를 떠드는 공화패당의 구호는 입 바른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하여 그는 프랑스 제국주의 특유의 식민지인 프랑스화 동화 정책에도 적대적이었는데, '문화적 동화란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적용되어야지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강요되는 즉시 오히려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 샤를 모라스의 논지였다. 이러한 샤를 모라스의 반제국주의적 관점은 모라시즘이 프랑스 식민지의 피지배 민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호감을 얻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알제리 독립운동의 거두이자 알제리 독립운동 조직 FLN의 얼굴마담이었던 페라트 압바스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알제리 독립 운동가들은, 본래는 동화 강요 없이 자신들(알제리 토착민)에게도 동등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거나 또는 알제리 지역 자치권을 준다면 그대로 프랑스인으로써 살겠다고 말한 UDMA 권리운동가들이었다. 그러나 샤를 모라스와 악시옹 프랑세즈가 프랑스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전무해졌고,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공화패당이 프랑스를 영구 지배하리라고 판단되자 완전한 독립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이다.
페라트 압바스를 위시로 UDMA 운동가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본래 모라스의 이론에 크게 감화된 모라시스트/프렌치 인테그랄리스트들이었다. 페라트 압바스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프랑스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으며, 악시옹 프랑세즈와 연대하는 알제리 기관지 '악시옹 알제리엔'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라스의 지방분권주의, 반제국주의, 반유대주의, 식민지 자치권 주장에 감화되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반유대주의의 경우, 당시 알제리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비호 아래에 피에누아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아랍계/베르베르계 알제리 토착민들의 상위에 서서 군림하고 있었고 이는 알제리 토착민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알제리 토착민들에게 모라스의 반유대주의는 매우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개념이었다.
그들은, 샤를 모라스와 악시옹 프랑세즈가 프랑스를 장악하고 왕정복고를 이루어내며 모라시즘 프랑스 국가를 형성한다면, 알제리인들이 마침내 '프랑스의 일원이면서도 동시에 고유 문화를 유지한 지역민이자 자기 권리의 소유주들로써'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페라트 압바스 "1920년 우리 세대의 사내들은 대개 20대였고, 개인적으로 나는 알제리가 1789년 전야의 옛 프랑스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알제리 무슬림들이 민족적으로 연대하며 충성스러운 프랑스 왕국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막는 구절은 성경이나 코란에 존재하지 않는다.")
샤를 모라스 역시 페라트 압바스, 하케미 체리프, 카빌리 베르베르 부족장들 등등 자신의 사상에 감화된 식민지 원주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1935년,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알제리를 방문하여 원주민들과 대화하고 그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비록 모라스는 피에누아(프랑스 본토계 알제리인)에 대해서도 온정적이었고 그들의 개척 정신을 치하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공화국이 인정하는 피에누아의 알제리 토착민 지배 체제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주권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할 곳에, 주권을 배치하고 우리의 역사적 왕조의 손으로 이를 보호함으로써, 알제리의 용감한 주민들은 진정으로 프랑스의 일부인 알제리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들은 프랑스 국기 하에서 알제리인으로써의 고유 권리를 유지하는, 프랑스 왕의 신민이자 알제리 지역민이 될 것이며, 그러한 조화로써 그들은 권위에 대한 찬탈을 시도하지 않게 된다."
모라스와 악시옹 프랑세즈의 집권이 저지되고, 또한 민주사회주의자들인 SFIO와 레옹 블룸의 블룸 비올레트 법안(식민지인들에 대한 평등한 시민권 부여) 통과마저도, 이른바 중도라고 불리는 공화주의자/자유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저지되자, 페라트 압바스를 위시로 한 거의 대부분의 알제리 권리운동가들은 그들의 기존 운동을 모두 포기하고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악시옹 프랑세즈 구성원들은 역설한다. "이러한 역사에서 미루어 보건대 그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자/공화주의자/평등론자들이 옳았는가 아니면 샤를 모라스/통합주의자/왕당파들이 옳았는가? 결론은 참으로 명백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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