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미

19세기 전반부 동안 미국의 성장

by карто́фель 2024. 10. 12.
반응형
1803년 루이지애나 구매 협정 당시 미 합중국은 유롭에게 서방세계의 외곽에 놓인 하찮은 소국이었을 뿐이었다. 당시 인구수는 아일랜드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자신이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입한 '자유의 땅'이 이후 수백 세대 동안은 족히 미국의 새 인구들을 지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1850년, 겨우 2세대 후면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 협정으로 생긴 땅을 채운 건 물론이고 이미 태평양 해안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185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미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서방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1860년에 미국은 3천 3백만명의 인구로 차 있었다. (이 중 4백만이 노예였다.) 불과 반세기라는 짧은 시간동안 미국은 유럽보다 네 배 빨리, 그리고 세계 평균보다는 여섯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이 현상은 세 가지의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유럽보다 1.5배 많은 출생률과 더 낮은 사망률, 그리고 이민. 인구 밀도가 유럽보다 훨씬 더 낮았고, 따라서 식량이 풍요롭게 생산되었고 분배될 수 있었기에 이를 통해 사람들은 더 일찍 결혼해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 북미 대륙에서도 전염병은 자주 돌았으나 워낙 낮은 인구밀도와 광활한 대지의 힘으로 인해 전염병의 영향은 유럽의 밀집된 인구에 비해 훨씬 약했다. 미 합중국의 토지/인구 비율은 개인 임금을 높였으며 그 반세기의 시간 동안 무려 5백만명의 이민을 촉진할 노동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은 이 시기 동안 전반적으로 인구가 농촌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 도시인구도 따로 보면 1801년부터 1860년까지의 기간 동안 농촌인구보다 세 배 빠르게 증가하여, 전체 인구비중이 6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급증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도회화 속도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非농경 종사 노동인구는 21퍼센트로부터 45퍼센로 증가했다. 한편 그 기간 동안 미국의 자연인구증가율(출생률-사망률)은 부모들이 개별 자녀들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자녀를 적게 낳기 시작하면서 점차 낮아졌다. 1800년에서 1850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인의 출산률은 23퍼센트 하락했다. 물론 사망률도 같이 낮아지긴 했으나 그 하락률은 5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락하는 출산률을 보충하는 이민률 덕분에 그 반세기의 기간 동안 미국은 10년 당 35퍼센트의 꾸준한 인구 증가를 유지했다. 그 반세기의 기간 동안 미국 전체의 인구 증가율에서 자연 증가율(출생-사망)은 75 퍼센트를 차지했으며 이민을 통한 인구증가율은 25퍼센트에 해당했다.

이러한 인구변화는 경제상황에 의해 촉진되었다. 매 23년마다 인구는 두배로 늘어났고, GNP는 매 15년마다 두 배가 되었다. 경제사학자들은 '언제'이 전반적 국가 성장이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이는 1840년 이전 까지는 단편적인 수량 기록 때문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1812 미영전쟁 후 -정확히 말하자면 1819-1823 경제불황 이후 회복기- 경제 성장률이 인구 증가율보다 더 빨라지기 시작했으며, 1820년부터 1860년까지 전체 국가 총 생산량과 전체소득이 매년 평균 1.7퍼센트씩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빠른 성장률은, 1837년에서 1843년까지의 경제불황을 제외하고, 각각 1830년대와 1850년대에 기록되었다. ​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 경제성장의 득을 보았으나, 보통은 사회 상층부가 하층부보다 더 큰 이득을 보았다. 평균소득은 102퍼센트나 증가하였으나,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겨우 40~65 퍼센트 증가하는데 그쳤다.

McPherson, James M. 1988.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g.9-10

 

181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도로라는건 진창길이나 다름없었으며 비라도 살짝 오면 완전히 무력화되는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1815년부터 학자들이 Transportation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일이 생긴다. 중앙정부에서부터 주정부, 사기업들 모두가 어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게 도로정비 사업에 뛰어 들었고 여러 주들에서 도로 뿐 아니라 운하들도 확보되고 정비되었다. 1815년부터 1850년까지, 전부 합치면 3천 7백마일에 이르는 길이의 운하건설 대열풍이 불었다. 이 운하들과 함께 연결된 강들을 타고 증기선들이 화물과 인력을 운반했으며 1850년에 이르면 9천마일에 이르는 철로망도 완성되었다. 그 후 10년간 철도는 더욱 무지막지하게 증설되어, 1860년에 이르면 전세계에 유래가 없는, 총 2만 1천 마일 규모의 선로망이 구축되었다.


이 운송혁명은 모든 걸 가능하게 했고, 미국의 경제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꿔놓아 대규모 급속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는 어마어마한 미국의 (북서부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던 시기에도) 대륙적 토지 규모로 인해 촉진된 혁명이기도 하다. 그런 땅덩이에서는 제대로 된 운송업과 운송수단의 발전, 도입이 선택이 아닌 절대적 필수요소였고, 필요로 인해 시작된 발전이 급격한 경제발전으로도 이어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