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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1914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 통첩을 대부분 수용했는가?

by Kartoffel 2024.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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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의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해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최대한 순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답변서를 다듬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답변서는 자신만만한 자화자찬으로 시작했다. 다시말해 세르비아 정부가 발칸전쟁 기간에 여러 차례 온건하고 평화적인 태도를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개인들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언론이나 '협회들의 평화로운 업무'를 직접 통제하지 않는 까닭에 빈에서 제기한 혐의에 놀라고 고통받은 터였다.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

그들은 오헝의 해체, 또는 제국의 영토 병합을 겨냥한 모든 선전을 비난한다는 데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조동사를 사용해 실제로 그런 선전이 있었다는 함축을 피했다.


영토회복주의 단체들을 억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방위단이나 다른 비슷한 협회들이 이제까지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세르비아 정부에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민족방위단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고 있을지 모르는 모든 협회'를 해산한다는데 동의했다.

 

답변서 3항은 세르비아 공교육에서 어떤 반오스트리아 선전이든 '황실-왕실 정부가 이런 선전의 사실과 증거를 제공할 때마다' 기꺼이 제거하겠다고 언명했다.


4항에서는 용의자들을 군에서 축출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이번에도 오헝 당국이 '이런 장교와 공무원의 이름과 행위'를 통지한 이후에만 축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오헝-세르비아 합동수사위원회를 꾸리는 문제(5항)에 대해서는 세르비아 정부가 '이 요구의 의미나 범위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국제법의 원칙, 형사소송, 선린관계'에 부합하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면 그런 협력을 수용하겠다고 답변했다.

 

오스트리아 관료들이 연루자들에 대한 기소에 참여하는 문제인 6항은 세르비아 헌법에 반한다는 이유로 전면 거부했다.


탄코시치와 치가노비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한 7항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는 '통첩을 전달받은 당일 저녁에' 이미 탄코시치를 체포했고, '아직 치가노비치를 체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후속수사를 위해 만일 있다면 유죄 증거나 유죄 추정 증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다소 기만적인 대응이었다. 사라예보 수사와 관련해 치가노비치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베오그라드 경찰국장이 특별 직권으로 그를 수도 밖으로 서둘러 내쫓았고, 그동안 정부는 밀란 치가노비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도에 없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불법활동에 가담한 국경 관리들을 처벌하는 문제와 관련한 8항과 이행 중인 조치를 오헝 정부에 보고하는 의무와 관련된 10항은 조건없이 수용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대공암살 이후 세르비아 관료들의 적대적인 공개 발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 9항에는 한층 모호하게 답변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그런 설명을 '기꺼이 제시'하겠지만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런 발언들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들을 통지하고 그 발언들을 실제로 해당 관료들이 했음을 보여주는 즉시' 하겠다고 했다.


이 답변서가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거의 완전히 항복하는 조치였다는,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자주 제기되는 주장은 실상을 크게 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르비아의 적이 아닌 친구들을 위해 작성한 문서였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에 내준 것은 놀라우리만치 적었다. 무엇보다도 이 답변서는 음모의 세르비아 배후세력에 대한 수사를 앞장서 개시하는 책임을 빈 정부에 지우면서도, 사건 관련 실마리를 효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줄 만한 양국 협력을 용인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요구에 대한 답변들 중 태반은 영토회복주의 선전 또는 장교와 관료의 음모활동에 대한 '사실과 증거'가 무엇인지를 놓고 오스트리아와 길고 짜증나는 십중팔구 무의미한 교섭을 벌일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가 '국제법'에 호소한 것은, 선전으로서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순전히 논점 흐리기였다. 이런 유형의 사건을 다루는 국제 법학도, 구속력있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할 권한을 가진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실제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매우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주권국가들이 출현하기 이전의 야만적인 시대로 퇴보한 이례적인 문서로 여기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이를테면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전달한 최후통첩보다 훨씬 관대했다. 랑부예 협정을 가리켜 가장 온건한 세르비아인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들로 이루어진 '도발, 폭격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이라고 말했을때, 헨리 키신저는 틀림없이 옳은 말을 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최후통첩 요구는 별것 아니었다.


분명 빈은 세르비아가 수용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고서 최후통첩을 작성했다. 다만, 이 최후통첩은 랑부예 협정과 달리 세르비아 국가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통첩의 항들은 세르비아의 영토회복주의가 오스트리아의 안보에 가하는 위협에 명확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심지어 5항과 6항에는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세르비아가 순응할 지 신뢰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반영되어 있었으며, 초안 작성자들은 그렇게 우려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912년 세르비아 정부는 열강에 보낸 회람장에서 오스만제국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공격을 정당화하면서 강압과 순응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세르비아에 따르면 오스만이 마케도니아에서 개혁의 필요성에 대처하는 데 거듭 실패한 것은 곧 그런 개혁에서 어떤 형태의 '외국의 참여'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들 스스로 진지한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은 '전세계에서 뿌리깊은 불신'을 받았다.

 

1914년 베오그라드에서 지난날 오스만과 당시 세르비아의 유사성을 누구 하나라도 알아챘을지 의문이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몽유병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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