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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빌헬름 2세와 무제한 잠수함 작전

by карто́фель 2024.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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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치와 군사 지도부에게 잠수함의 활용은 전쟁의 가장 논쟁적인 문제였다. 해군사령부는 잠수함이 영국을 상대로 역봉쇄를 구축해 전쟁에서 몰아냄으로써 독일의 전쟁 전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달성하려면 적군의 상선을 상대로 잠수함을 배치하고 중립적인 상선을 '전역'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잠수함을 배치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국제법은 상선에 대한 잠수함의 사용을 규정하지 않았다. 이 법은 '방문과 수색'의 규칙을 따르기로 되어 있는 수상함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립국의 함선이 계속해서 전쟁 지역을 횡단한다면, 이는 타당한 것이었을까? 또 공격목표에서 배제된다 하더라도 잠수함 함장들이 중립 함정과 적 함정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사고가 불가피했다. 정당한 대상을 정의하고 구분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존재했다.

 

여객선에 밀수 중인 군수품이 실려 있을 경우에도 여객선은 공격 대상이 되어선 안되는가?

 

독일의 북부 항구에 대한 영국의 '불법' 봉쇄는 영국의 해운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중립국의 승객들을 태운 적대국의 함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15년 초까지 U보트가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의사결정 엘리트들 사이에 깊은 분열을 가져왔다. 수상 베트만-홀베크는 포괄적인 잠수함 작전의 위험이 잠재적 이득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다. 만약 무차별적인 U보트 공격이 미국을 독일의 적에 편에 서게 만든다면, 독일의 승전 가능성이나 심지어 유리한 평화의 가능성까지 증발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와 반대로 티르피츠 해군장관과 바흐만 해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매파는 잠수함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영국의 '기아 봉쇄'에 대한 보복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빌헬름 2세는 잠수함 배치 문제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처음에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에 온건한 견해를 보였고, 나중에 그가 말했듯이 '무고한 승객들이 바다에서 익사한다는 생각은 그를 섬뜩하게 했다'. 그러나 1915년 2월 31일, 미국이 연합국에 잠수함 등 군사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빌헬름 2세는 티르피츠의 압력으로 지정된 전쟁지역 내에 있는 연합군 상선들이 경고없이 어뢰로 격침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2월 4일 출범한 새 정책은 5월 초 밀수중인 화물을 싣고 있던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익사한 1,198명의 승객들 중에는 100명 이상의 미국 시민이 있었다. 뒤따르는 국제적인 소동에 겁을 먹고,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베트만-홀베크는 잠수함에 대한 제약을 다시 부과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1915년 5월 31일 회의 후, 베트만-홀베크는 잠수함 지지자들을 압도하였고, 다음날 빌헬름 2세는 모든 잠수함 함장에게 중립적인 선적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며, 의심이 가는 경우에는 '중립적인 상인을 침몰시키는 것보다 적 상인을 통과시키는 것이 낫다'는 명령을 내렸다. 추가적으로 1915년 6월 6일에는, 국적 불명의 모든 대형 여객선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티르피츠와 바흐만은 분노했고 새로운 정책에 대한 그들의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공동 전보로 응답했지만, 빌헬름 2세는 그의 입장을 고수하며 이 명령이 절대 비밀로 유지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이 선동적인 해군 장관이 정부의 제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1월의 힌덴부르크의 불복에 대한 불길한 재방송과 같이, 티르피츠와 바흐만은 이제 사표를 제출했다. 빌헬름 2세는 고문들을 향해 "안돼! 신사들은 복종하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해!'라고 말하며 수리를 거부했다.

1915년 8월 19일 U-24의 슈나이더 중위에 의해 또 여객선이 침몰한 후, 베트만-홀베크는 빌헬름 2세에게 추가적인 제약을 도입하도록 설득하였고, 이로 인해 잠수함은 '사실상 무력'하게 되었다. 티르피츠는 예상한대로 격분하여 또다시 사표를 제출했다. 빌헬름 2세는 이전 사례인 힌덴부르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관리를 해임하는 것을 꺼렸지만, 티르피츠의 짜증나는 조수 바흐만은 해임되었다.

빌헬름 2세는 수상을 중심으로 묶인 정치 고문들의 주장을 뭉뚱그린 해군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적들을 위해 무제한적인 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적극적인 적'으로서 참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1916년 내내, 무제한 잠수함전에 대한 의회와 언론의 지지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2세와 베트만-홀베크는 잠수함전에 대한 로비를 저지했다.

3월 15일, 베트만-홀베크는 빌헬름 2세에게 그의 장관들 중 일부를 해임하도록 설득했다. 티르피츠의 전쟁 발발 이후 세 번째 사표는 카이저에 의해 수리되었다. 몇 차례 실험 기간 동안 약간 느슨해진 제한으로 인해 3월 24일 기뢰부설함으로 오인된 채널 횡단 기선 서섹스가 침몰한 후에 빌헬름 2세는 어떠한 선박도 사전 경고 없이 침몰할 수 없다고 명시한 새로운 명령을 내렸고, 이는 해군 지휘관들이 대서양과 영국 해협에서 잠수함 작전을 전면 중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빌헬름 2세의 입장은 특히 미국의 참전으로 인한 막대한 결과를 고려했기 때문이나 강한 도덕적 유보 역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여성과 아이들로 가득 찬 거대한 여객선을 어뢰로 격침시키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야만적인 잔인성이며, 우리는 이를 인해 전 세계의 증오와 독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라는 견해를 취했다.따라서 빌헬름 2세는 매파의 요구에 맞서 의사결정 엘리트 내의 정치적으로 온건한 요소들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1917년 1월 무제한 잠수함전 정책을 지지했을까?

 

여론은 확실히 핵심 요소였다. 1916년 하반기에는 잠수함전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폭넓은 지지가 확산되었는데, 특히 5월 말 유틀란트 해전이 영국의 봉쇄를 해제하지 못하자 더욱 그랬다. 무제한 잠수함전에 대한 지지는 1915년의 잠수함 선동을 지배했던 합병주의적 환경뿐만 아니라, 국회 정당 스펙트럼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 연합의 핵심으로 보여진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높아진 독일 국민들에게 어필했다.

잠수함은 로저 치커링의 표현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을 굴복시킬 것을 약속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물론 널리 퍼지는 의견의 풍토는 빌헬름 2세를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빌헬름 2세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상의 위치를 약화시켰고 행정부의 균형을 잠수함 매니아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16년 여름과 가을 동안, 무제한 잠수함전에 대한 지지는 수상의 의회 기반에 대한 강력한 용매로 작용했다. 

1916년 10월, 보수당과 자유당은 'U보트 블록'을 형성하였고, 충성적이었던 중앙당조차도 잠수함 배치에 대한 총리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의 무제한 잠수한전 수용 결정에서 또다른 중요한 요인은 1916년 12월 독일과 전쟁중인 국가들에 대한 베트만-홀베크의 평화에 대한 실패였다.

 

12월 12일의 평화조서는 수상과 최고사령부 사이의 표현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는 독일이 평화에 대해 말할 용의가 있다는 발표와 함께 시작되었으나, 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승리를 향해 싸우겠다는 경고로 종결된 특징적으로 상반된 소통이었다.

빌헬름 2세는 베스만의 구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는데, 라마르 세실이 제안한 '편리함'의 이유뿐 아니라 전쟁에 진정으로 지쳤기 때문(그는 또한 국회 대표단과의 만남에서 '평화'라는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졌다)이며 또 그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군주의 성스로운 책무라 여겼다.

12월 12일의 평화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

평화에 대한 연합군의 부정적인 대답이 발표되자, 빌헬름 2세는 독일이 끝까지 싸워 벨기에를 합병해야 하며 프랑스를 제압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분노했다.

 

1916년 12월 하순의 운명론적이고 독선적인 분위기 속에서, 빌헬름 2세는 무제한 잠수함 전을 수용하려 했다. 1915년부터 활동을 전개해온 잠수함 지지자들은 이제 영국 해협과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전이 영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와 통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북해에서의 잠수함전은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독일 잠수함이 상당수의 미군이 오기 전에 이미 연합군의 대서양 횡단 해운을 중단시켰을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병력 수송을 저지하는데 거의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참전 위험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빌헬름 2세는 재빨리 이 주장들을 그의 주장으로 채택했다. 

1917년 1월 9일 플레스의 동부 전선 사령부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군 사령부에 의해 조직된 회의에서 카이저는 이미 장군들을 지원하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새로운 잠수함 전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지만,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고 결국 다수 의견을 묵인했다. 빌헬름 2세는 베트만-홀베크가 자신의 반대 의견을 열거하자 조바심을 보였고,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전쟁이 시작된다는 취지의 명령에 서명했다. 이 결정이 독일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즉시 단절시켰고, 4월에는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독일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장기적으로는 대륙간 소모전에서의 승산이 독일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일까? 이것에 대한 적어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17년 1월 독일은 루마니아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비록 독일이 그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에서의 승리는 멀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고 영국은 돈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독일군이 알고 있는 것보다 재정 파탄에 훨씬 가까웠다.

1916년 가을, 영국의 대 독일 봉쇄에 대한 미국의 분노가 고조되었고 영미 관계는 최악이었다. 미국의 참전와 그와 함께 제공된 포괄적인 원조가 없었다면, 영국은 1917년 여름이나 가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한 무렵에 평화를 제안해야했을 것이다. 이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전에 나서지 않고 미국이 중립을 유지했다면 연합군의 손에 독일군이 패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독일의 가장 좋은 기회는 '여러 전선에서 연합국의 해운 마비, 재정, 군대의 붕괴를 기다리는 것'에 놓여있다. 

빌헬름 2세 자신은 일시적으로 이 가능성을 엿본 것으로 보인다. 1916년 11월 말 빈을 방문한 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혁명', '러시아의 완전한 군수 실패', '영국의 기근',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까지 지친 프랑스 군대를 예측했다. 빌헬름 2세의 대담자들은 이를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이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능성 있는 상황이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카이저 빌헬름 2세:권력의 삶


https://gall.dcinside.com/m/rome/76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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