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말해서, 기사수도회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모호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이마드 알딘은 술탄이 '부정한 씨족들의 땅을 정화할' 기회를 즐겼으며, 그것이 행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고 말한다. 험프리스는 이마드 알딘이 묘사한 이 처형 장면을 '이상할 정도로 잔혹하고 환희에 차 있으며, 아랍 문학에서 가장 추악한 구절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승전 이틀 후인 4월(라비 앗 싸니) 17일 월요일 아침 술탄은 포로로 잡힌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원들을 찾으며 '내가 이 두 부정한 씨족들의 땅을 정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50디나르씩 약속하셨다.
곧 백 명 이상의 기사단원들이 술탄 앞으로 끌려 나왔다. 술탄은 그들을 참수하라고 명하셨다. 그분 곁에는 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sufis)과 독실한 무슬림과 금욕주의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칼을 뽑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직접 포로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술탄은 즐거운 얼굴로 연단 위에 앉아 있었다. 아미르들이 2열로 도열했고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섰으며 불신자들의 얼굴에는 암울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깔끔하게 베어 죽여서 칭찬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망설이다가 물러난 사람들도 있었고, 바보 같은 짓으로 웃음거리가 돼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비웃으며 학살을 벌이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행한 수많은 맹세들, 자신이 받은 수많은 칭찬들, 스스로 흘린 피의 대가로 얻어낸 영원한 보상들, 잘라낸 적들의 목으로 더해진 경건한 업적들에 대해 말하면서 포로들을 죽였다:
바라마지않던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칼날을 피로 얼룩지게 하였는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창을 휘둘렀는가!
성전기사단원들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세상의 얼마나 많은 고통을 치유했는가!
지도자들을 돕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했는가!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깃발을 펼쳤는가!
나는 그가 어떻게 이슬람을 살리기 위해 불신자들을 죽이고, 유일신을 세우기 위해 다신교를 파괴하고,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위해 결정을 이행하고,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적들을 베었는지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파티마조 이집트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우사마 이븐 문끼드는 당시 성전기사단 본부가 있던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서 이슬람식 기도를 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전 기사단이 그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알아크사 사원 경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사원 옆에는 작은 사원이 있는데 프랑크인들은 그곳을 교회로 삼았다. 내가 알아크사 사원에 들어가면, 내 친구들(asdiqai)인 그곳의 성전 기사단원들은 내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그 작은 사원을 비워주었다. 어느 날, 나는 그곳에 들어가 '알라는 위대하시다.' 라고 읊으며 예배를 드리려고 서 있었다...."
콥은 이 사건의 정확한 시기를 우사마가 외교 임무를 맡고 예루살렘에 갔던 1138년으로 추정했다. 살라딘의 극단적인 적개심과 우사마의 우호적인 경험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설명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험프리스는 기사단의 군사적 능력 때문에 살라딘이 그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다소 설득력이 있다. 이븐 알아시르는 기사단이 '프랑크인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투사들이기 때문에 술탄이 그들을 골라내서 죽였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프랑크인들의 왕은 약 150명의 유명한 기사들과 전사들과 함께 언덕에 남아있었다. 살라딘의 아들 알 아프달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전투였고, 나는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의 왕이 군사들과 함께 언덕 위로 몰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과 대치한 무슬림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돌격을 가해서 그들을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내몰았다.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때 그분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턱수염을 붙잡고 '악마가 거짓임을 증명하라'고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셨다.
무슬림들이 재집결해서 언덕 위로 진격했고, 프랑크인들이 그들에게 밀려서 후퇴했다. 나는 기쁘게 외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하지만 프랑크인들이 재집결해서 다시 돌격했고, 무슬림들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밀려났다. 아버지는 처음과 똑같이 행동했고, 무슬림들이 다시 프랑크인들을 향해 돌아서서 그들을 언덕 위로 내몰았다. 내가 다시 외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조용 하거라! 왕의 천막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긴 게 아니야.' 이 말을 하는 동안 천막이 쓰러졌다.
아버지 술탄께서는 말에서 내리고는 바닥에 엎드린 채 전능하신 알라께 감사드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왕의 천막이 쓰러진 이유는, 프랑크인들이 공격을 할 때마다 더욱더 갈증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공격들로 언덕에서 탈출하기를 바랐으나, 탈출할 방법을 찾지 못하자 말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올라와서 왕의 천막을 쓰러뜨렸다.
...
살라딘은 두 기사단에 소속된 포로들의 몸값으로 각각 50 이집트 디나르를 지불했다. 즉시 200명의 포로들이 그의 앞에 끌려 나와 참수당했다. 이들은 프랑크인들 중에서 가장 사나운 투사들이었기 때문에 골라내서 처형한 것이다."
험블린은 하틴에서의 학살은 기사단의 군사적 능력과 비타협성, 그리고 기사단이 주둔한 예루살렘의 '영적인 오염'에 의해 부채질 된 이슬람의 이념적 적대감이 극단적인 수준까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가정했다. 결정적으로 험블린은 우사마와 성전기사단의 우정과 1180년대 살라딘의 통치 시기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사마의 진술만이 기사단원들이 무슬림에게 자주 놀라운 관용을 보였음을 드러내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기사단은 일반적으로 무슬림을 개종시키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성전기사단이 이슬람 종교 행사에 보인 지나친 관용은 성전기사단이 이단 혐의로 고발당했을 때 그들을 향해 쏟아진 적대적인 소문들에 불을 붙였다. 1237년 구호기사단은 무슬림 농노들을 개종시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일로 교황에게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무슬림들도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병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사단들은 이슬람 군대와 정치세력을 상대로는 대체로 강경하게 대응했지만, 그들이 일반 이슬람 농민들에게 잔혹 행위를 벌였다는 증거는 없다. 즉, 그들은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근절하는 일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성전기사단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함께 예배를 보는 시리아의 사이드나야 사원의 성모 마리아 찬양 집회를 홍보하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이 사원의 성상에서 수집한 성유를 정기적으로 유럽에 유통했다.
케다는 사이드나야 사원에 대한 옹호가 성전기사단의 명성을 훼손시켰고, 그들이 무슬림들과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라는 의심에 불을 붙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Kevin James Lewis, Friend or foe: Islamic views of the military orders in the Latin East as drawn from Arabic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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